• 장마통에 쓸려간 것들
    [낭만파 농부] 폭우 폭염 이어지고
        2023년 07월 31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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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림] 양력백중놀이를 취소합니다

    이번 주 말 진행할 예정이던 벼두레 주최 2023년 양력백중놀이를 전면 취소합니다.

    오랜만에 햇볕이 쨍하고, 날씨가 쾌청한데 어인 일인가 의아하실 분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과 내일 반짝 갰던 날씨는 주말을 앞두고 다시 장맛비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그리고 물이 불어난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 건 몹시 위험하지요.

    아울러 전국을 강타한 극한폭우로 많은 이재민과 인명피해가 발생한 상황이라 다들 무척 심란하다는 점도 감안했습니다.

    더러 아쉽더라도 이 점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조만간 다른 멋진 프로그램으로 아쉬움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 전, 동네톡방에 올렸던 공지사항이다. 벌써 아득한 얘기가 됐다. 그리고 한 달 가까이 반도 남쪽을 할퀴던 장마는 짙은 상처를 남긴 채 물러갔다고 한다.

    많은 이가 아까운 목숨을 잃고,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제방이 무너지고, 농경지가 망가지는 난리를 겪은 마당에 노는 얘기로 말문을 여는 게 여간 계면쩍지 않다. 그래, 이 동네는 집중폭우에 따른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물론 전국을 강타한 역대급 물난리에 견주어서 그렇다는 얘기지 설마 장마전선이 여기만 피해갔겠는가.

    경북 지역의 산사태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우리 논 바로 위에 있는 저수지 제방이 일부 무너지고, 농수로 뚝의 옹벽이 헐렸다. 엄청난 장대비가 미친 듯이 쏟아질 때는 뒷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산자락 바로 아래 자리한 우리집을 덮치는 건 아닌지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다. 장마철이면 늘 “집 떠내려갈까 걱정”이라고 짐짓 엄살을 늘어놓기도 했더라만, 한참이나 장대비 퍼붓는 산자락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애를 태우기는 또 처음이다.

    벼포기가 폭우에 잠겨 저수지로 둔갑한 논배미
    중경제초기로 김매기

    하루 동안 3백미리 가까운 극한폭우가 쏟아지던 날, 대숲말 4마지기 배미는 빗물에 잠기고 말았다. 바로 옆 산에서 한꺼번에 흘러내린 빗물이 좁은 배수관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탓이다. 벼포기가 깊숙이 잠긴 논배미는 느닷없이 저수지로 둔갑해버렸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넋 놓고 바라볼 밖에는, 다행히 비가 그치면서 이튿날 새벽 달려 가보니 물이 빠져 있었다. 토사가 덮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반면 저만치 삼례, 봉동 쪽의 일부 비닐하우스는 물에 잠기는 바람에 아예 농사를 망쳤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야 들었다. 물 건너 비닐하우스 단지 또한 그만큼은 아니지만 꽤 피해가 컸던 모양이다.

    재 넘어 너멍굴에서 천수답 다섯 마지기를 짓는 고니 씨는 물을 가둬두는 둠벙 뚝이 무너지고 논둑이 허물어지는 통에 “일찌감치 만세를 불렀노라” 한숨을 지었다.

    유기농 쌀을 자체 생산해 전통주를 빚겠다며 호기롭게 스무 마지기 벼농사에 도전한 술도가팀. 호된 신고식을 치르느라 세 배미에 물달개비와 올챙이고랭이 따위 논풀이 빽빽하게 올라왔다. 손 김매기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 예초기에 매달아 쓰는 중경제초기를 돌리기로 했는데 날이면 날마다 장대비가 쏟아지니 손 놓고 애를 태워야 했다. 그나마 빗줄기가 수굿해지고 나서야 작업에 들어가 보름 만에 중경제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모내기 뒤 한 달이 지났으니 바야흐로 ‘중간물떼기’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었다. 수분 공급을 차단해 쓸데없는 생육(헛새끼치기)을 막고, 흙 속에 공기를 불어 넣어 뿌리를 키우는 공정이다. 논바닥에 쩍쩍 금이 갈 정도로 말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주구장창 굵은 비를 뿌려대니 논바닥이 마를 새가 있는가 말이다. 제때를 훌쩍 넘겨 벼두레 톡방에 중간물떼기 ‘작업지침’을 내렸지만 그 때까지도 장마는 이어지고 있었으니 참 폭폭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햇볕 한 줌이 아쉬운 나날이 이어지면서 세상이 온통 축축하니 벼의 생장을 좌우하는 일사량은 그만두고 병충해가 번지기 딱 맞는 조건 아닌가. 그렇다고 농약을 칠 것도 아니고 그저 ‘될 대로 돼라’ 넋 놓고 보아온 터다.

    삶 자체가 무너진 건 아니지만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더러 낮술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거나 읍내 미디어센터에서 틀어주는 영화 한 편으로 울적한 심사를 다스리기도 했지만 내내 집안에 갇혀 지내온 신세. 그 와중에도 돼지농장 문제가 잘 풀린 것을 축하하는 동네잔치를 벌이기로 했는데, 세상이 난리통인지라 널리 알리지도 못하고 그 얘기 언제 꺼내나 끙끙 앓기도 했더랬다.

    사상 초유의 극한폭우, 알고 보면 이게 다 그놈의 기후위기 탓 아니던가. 장마철 끝나고 나니 다시 푹푹 쪄댄다. 이제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열대화’(UN 사무총장)에 따른 극한폭염이 몰려올 차례인가. 올해는 또 얼마나 뜨겁게 지구를 달굴지. 에어컨을 들이지 않고서 올해도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내쉬는 한숨마저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있다.

    * <낭만파 농부>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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